새로운 대한민국 이야기
김문수 만화로 알아보기 본문
김문수 만화로 알아보기
‘올바른’ 아이의 탄생
김문수는 1951년 경북영천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6번째]
(70년대까지 명심보감을 가르칠 정도로)
그곳은 선비정신과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항상 바르고 의젓해야 한다. 어디 가서 함부로 웃어도 안 된다.”
“옳은 일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어린 문수를 한 번도 업어준 적이 없을 정도로 엄격하셨다)
엄격한 교육환경 속에서 어린 문수의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신념과 소신, 정직한 실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지독한 가난의 시작
소년 문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생의 큰 곡절을 겪는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섰다가
문수네 7남매는 졸지에 정든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야 했다.
전깃불조차 안 들어오는 판잣집.
7남매가 살기엔 너무 비좁았다
동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이런데서 살아야 돼?”
어린 문수는 판잣집이 부끄러워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도 피해 다녔다.
고교시절 첫 시위
김문수가 고3이던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3선 개헌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김문수와 친구들은 단체 행동을 결행한다.
운동장에 모인 경북고생들은 대구 2.28 기념탑까지 함성을 지르며 뛰어갔고
‘3선 개헌 반대’ 성명서를 낭독한 뒤 해산한다.
이 사건으로 김문수는 무기정학을 당한다.
그러나 문수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사회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무신에 맨발로 상경하다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문수.
(맨발에 고무신 신고 상경)
그러나 대학생활은 기대 이하였다.
단답형 객관식 문제를 풀며 대학에 대한 실망이 쌓여갈 때,
한 선배가 나타났다.
“여러분! 우리가 출세하려고 대학에 왔습니까?”
그 말에 가슴이 뛴 청년문수.
서클(후진국연구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청계천 근처의 판잣집에서 빈민촌체험에 나선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아침마다 공용화장실 하나를 쓰기위해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빈민촌 풍경을 보며
김문수는 가난이 초래한 인간성 상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
위장 취업과 장티푸스
1971년, 대학교 2학년
김문수는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미싱 공장에 취업한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에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이 공장활동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공장생활은 하루 종일 드릴로 미싱에 구멍을 내는
단조롭고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이 때 공장에서 마셨던 더러운 물 때문에 ‘장티푸스’에 감염된다.
치료시기를 놓쳐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사경을 헤매던 김문수.
중이염 까지 재발하여, 병역면제 판정을 받는다.
강제 징집을 위해 찾아왔던 보안사 요원들은
송장처럼 누워있는 김문수를 보고 그냥 돌아간다.
(보안사요원들 대사: 아무래도 징집은 안 되겠어!)
똥 손 김문수, 매일 욕먹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김문수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청계피복노조 간부들과
본격 노동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동대문시장 재단사보조로 취직한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고 보니 일이 쉽지 않았다.
옷에 단추 구멍을 내는 단순작업 조차
손재주가 없어 너무 일을 못했다.
고향에선 똑똑한 아이로 대우 받던 김문수,
공장에서는 매일 구박을 받았다.
어느날 사장이 불렀다.
“어이 김씨.. 안 되겠어. 다른 직장을 알아봐!”
크게 좌절한 김문수.
그러나 고민 끝에 다른 업종을 찾아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자격증 따기에 돌입한다.
(이후 그가 딴 자격증 무려 9개)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대학 시절,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던 김문수.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생활을 하던 탓에
어머니가 위암에 걸린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 평생 걱정만 끼쳐드렸을 뿐
따뜻한 말 한마디 해드린 적이 없었다.
위암에 좋다는 약초란 약초는 다 찾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했지만,
정작 가족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어머니는 평소 문수의 대학 졸업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문수야, 어디서 무얼 하든 엄마는 너를 믿는다. 하지만 제발 대학만은 꼭 졸업해다오!”
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셨던 56세의 어머니를 서럽게 보내던 날,
김문수의 가슴에는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
김문수 러브 스토리,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김문수는 금속노조에서 알게 된
설난영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에게 처음부터 매력을 느꼈다.
급기야, 프러포즈를 결심한다.
[79년 12월, 어느 다방]
“설 분회장!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설난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잘라 말했다.
“전 결혼 생각이 없어요. 노조 하면서 결혼은 못해요.”
잔뜩 기대하고 있던 김문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포기할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 진 계기는 김문수의 도피 생활이었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김문수]
전두환정권의 등장과 함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위기에 빠진다.
김문수는 설난영에게 불쑥 찾아가 그녀가 살던 집, 작은 방에 숨어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아래는 다음 목차
김문수 결혼 스토리, “자네, 우리 딸 어떻게 먹여 살릴건가?”
고문, 그리고 위로 “이대로 죽겠구나”
김문수, 김영삼을 만나다
지옥철, 대통령도 같이 타 봅시다!
국민의 머슴을 자처한 국회의원
김결식, 회의장 난입사건
김문수의 청렴 정책이 이재명을 위기로
서울-경기 환승시스템을 쟁취하다
GTX의 비밀, ‘G’는 경기도였다
닥터 헬기의 원조, 김문수
김문수가 관등성명을 물은 이유(119 사건의 전말)
김문수가 골프 못치고, 철봉만 하는 3가지 이유
김문수 평전 만화판 원고
‘올바른’ 아이의 탄생
김문수는 1951년 경북영천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6번째]
(70년대까지 명심보감을 가르칠 정도로)
그곳은 선비정신과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항상 바르고 의젓해야 한다. 어디 가서 함부로 웃어도 안 된다.”
“옳은 일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어린 문수를 한 번도 업어준 적이 없을 정도로 엄격하셨다)
엄격한 교육환경 속에서 어린 문수의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신념과 소신, 정직한 실천!’
‘그렇게 살아야 한다.’
지독한 가난의 시작
소년 문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생의 큰 곡절을 겪는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섰다가
문수네 7남매는 졸지에 정든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야 했다.
전깃불조차 안 들어오는 판잣집.
7남매가 살기엔 너무 비좁았다
동생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이런데서 살아야 돼?”
어린 문수는 판잣집이 부끄러워 친구들을 한 번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도 피해 다녔다.
고교시절 첫 시위
김문수가 고3이던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3선 개헌은 잘못’이라고 생각한 김문수와 친구들은 단체 행동을 결행한다.
운동장에 모인 경북고생들은 대구 2.28 기념탑까지 함성을 지르며 뛰어갔고
‘3선 개헌 반대’ 성명서를 낭독한 뒤 해산한다.
이 사건으로 김문수는 무기정학을 당한다.
그러나 문수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는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사회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지만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고무신에 맨발로 상경하다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문수.
(맨발에 고무신 신고 상경)
그러나 대학생활은 기대 이하였다.
단답형 객관식 문제를 풀며 대학에 대한 실망이 쌓여갈 때,
한 선배가 나타났다.
“여러분! 우리가 출세하려고 대학에 왔습니까?”
그 말에 가슴이 뛴 청년문수.
서클(후진국연구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청계천 근처의 판잣집에서 빈민촌체험에 나선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아침마다 공용화장실 하나를 쓰기위해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빈민촌 풍경을 보며
김문수는 가난이 초래한 인간성 상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
위장 취업과 장티푸스
1971년, 대학교 2학년
김문수는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미싱 공장에 취업한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에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이 공장활동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공장생활은 하루 종일 드릴로 미싱에 구멍을 내는
단조롭고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이 때 공장에서 마셨던 더러운 물 때문에 ‘장티푸스’에 감염된다.
치료시기를 놓쳐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사경을 헤매던 김문수.
중이염 까지 재발하여, 병역면제 판정을 받는다.
강제 징집을 위해 찾아왔던 보안사 요원들은
송장처럼 누워있는 김문수를 보고 그냥 돌아간다.
(보안사요원들 대사: 아무래도 징집은 안 되겠어!)
똥 손 김문수, 매일 욕먹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김문수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청계피복노조 간부들과
본격 노동운동을 시작하는 한편
동대문시장 재단사보조로 취직한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고 보니 일이 쉽지 않았다.
옷에 단추 구멍을 내는 단순작업 조차
손재주가 없어 너무 일을 못했다.
고향에선 똑똑한 아이로 대우 받던 김문수,
공장에서는 매일 구박을 받았다.
어느날 사장이 불렀다.
“어이 김씨.. 안 되겠어. 다른 직장을 알아봐!”
크게 좌절한 김문수.
그러나 고민 끝에 다른 업종을 찾아보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자격증 따기에 돌입한다.
(이후 그가 딴 자격증 무려 9개)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대학 시절, 제적과 복학을 반복하던 김문수.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생활을 하던 탓에
어머니가 위암에 걸린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 평생 걱정만 끼쳐드렸을 뿐
따뜻한 말 한마디 해드린 적이 없었다.
위암에 좋다는 약초란 약초는 다 찾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했지만,
정작 가족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어머니는 평소 문수의 대학 졸업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문수야, 어디서 무얼 하든 엄마는 너를 믿는다. 하지만 제발 대학만은 꼭 졸업해다오!”
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셨던 56세의 어머니를 서럽게 보내던 날,
김문수의 가슴에는 주체할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무덤 앞에서 우는 장면)
김문수 러브 스토리,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김문수는 금속노조에서 알게 된
설난영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에게 처음부터 매력을 느꼈다.
급기야, 프러포즈를 결심한다.
[79년 12월, 어느 다방]
“설 분회장!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설난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잘라 말했다.
“전 결혼 생각이 없어요. 노조 하면서 결혼은 못해요.”
잔뜩 기대하고 있던 김문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포기할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 진 계기는 김문수의 도피 생활이었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김문수]
전두환정권의 등장과 함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위기에 빠진다.
김문수는 설난영에게 불쑥 찾아가 그녀가 살던 집, 작은 방에 숨어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김문수 러브 스토리,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김문수는 금속노조에서 알게 된
설난영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에게 처음부터 매력을 느꼈다.
급기야, 프러포즈를 결심한다.
[79년 12월, 어느 다방]
“설 분회장! 시집갈 데 없으면 나한테 와요!”
설난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잘라 말했다.
“전 결혼 생각이 없어요. 노조 하면서 결혼은 못해요.”
잔뜩 기대하고 있던 김문수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포기할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 진 계기는 김문수의 도피 생활이었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김문수]
전두환정권의 등장과 함께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위기에 빠진다.
김문수는 설난영에게 불쑥 찾아가 그녀가 살던 집, 작은 방에 숨어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김문수 결혼 스토리, “자네, 우리 딸 어떻게 먹여 살릴건가?”
결혼을 앞둔 문수에게 장인어른이 물었다.
“자네, 결혼하면 우리 딸 어떻게 먹여 살릴 건가?”
“아버님, 저는 만인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가족 하나 간수 못하겠습니까?”
장인어른은 그 말에 호탕하게 웃더니 결혼을 허락하셨다.
반대는 김문수의 집안에서도 있었다.
“경상도에도 여자가 많은데 왜 하필 전라도 처녀와 결혼을?”
그게 결혼 반대의 이유였다.
설난영은 전남의 순천여고를 다닌 호남사람이었다.
그 시절엔 영, 호남의 남녀가 혼사를 맺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문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출신 지역이 대체 뭐가 중요합니까! 사람이 중요하지!”
김문수의 고집에 결국 문중 어르신들은 결혼을 받아들인다.
[1981년 9월 26일, 김문수의 결혼식 날]
김문수와 설난영의 결혼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결혼식장이던 작은 교회를 버스로 포위해버렸다.
결국 하객보다 전경이 더 많은 유례없는 결혼식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 죽겠구나”
1985년 이른바 서노련사건으로 공안당국에 검거된 김문수.
전기 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몽둥이 찜질 등 온갖 고문이 가해졌다.
당국은 심상정과 박노해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김문수는 모진 고초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대로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감옥으로 보내진 김문수
그러나 구치소에 수감된 지 5개월 만에
갑자기 0.75평, 빛 한줄기 없는 지하 독방으로 끌려간다.
이 때 그는 포승줄에 묶인 채, 마치 개처럼. 밥그릇에 코를 박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도, 용변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절망감과 수치심, 모멸감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자!’는 생각에, 있는 힘껏 머리를 벽에 박았지만
감옥의 벽은 스티로폼 위에 얇은 나무판을 덧댄 것이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김문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고통의 순간에도
‘날 고문하는 저 사람들도 독재의 피해자'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김문수는 당시 그를 고문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 시절 고문했던 사람들 중에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까지 연락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 반갑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김문수, 김영삼을 만나다
6월 항쟁이 끝났을 무렵,
2년 6개월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김문수
그러나 막상 출소 하고 보니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1980년대 말은, 세계적인 전환기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대사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김문수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문수의 나이 마흔.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바라보면서,
운동권의 철학과 세계관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청년 김문수는
한때 존경하던 스승, 안병직 교수를
사회주의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운동의 배신자라 비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스승의 뒤를 따랐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 앞에서
김문수는 혁명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도 중요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관성이 아니라
전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진정한 운동가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운동보다 정치의 중요성을 절감한 김문수는
1990년 재야세력 최초의 대중정당인 민중당을 거쳐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자유당에 입당한다.
지옥철, 대통령도 타 봅시다!
1994년 국회의원 선거
김문수는 파란을 일으킨다.
정치 신인 김문수가 민자당이 크게 불리한 부천에서
강타자로 꼽히던 박지원을 꺾었기 때문이다.
김문수는 이 때 서울과 부천을 오고가는 지옥철 문제를 집중적으로
호소해 시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김문수는 자신이 여당 후보였지만, 이렇게 외치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지옥철, 대통령도 타봅시다”
얼마 후, 김문수는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셨던 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입학한지 무려 24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마흔 네 살의 나이로 부모님 영전에 졸업장을 바치며
문수의 뺨에 굵은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출퇴근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국회의원이 된 뒤, 김문수는 국회 입구에서 경찰의 검문을 많이 받았다.
“어디가십니까?”
“저 국회의원인데요.”
“네? 정말입니까?”
“김문수 의원입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국회의원들은 다들 까만색 고급승용차를 탔는데,
김문수는 낡은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바람에 계속 검문에 걸렸다.
국회 입성 후, 김문수는 대표공약인 ‘지옥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여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내무부 장관, 교통부 장관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제발 지하철 한번 타보라!”며 설득을 계속했다.
결국 김문수가 국회 대정부 질문까지 벌인 뒤에야
정부는 경인선 복복선 조기 개통을 약속한다.
드디어 1999년 1월 29일,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였던 경인선은
개통100년 만에 구로-부평 구간에서 복복선이 건설된다.
이러한 김문수의 뚝심과 집념은 향후 GTX 건설의 큰 밑거름이 된다.
서울-경기 버스 환승을 자유롭게!
“서울은 환승할인이 되는데 경기도는 왜 안 됩니까?”
“경기도민은 서울 밖에 산다고 차별하는 건가요?”
부천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김문수.
그 때만 해도 경기 버스와 서울 버스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갈아 탈 수 없었다.
김문수는 수도권 통합요금제를 실현하고
거대한 메가시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문수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이철 코레일 사장에게
밤낮 없이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지겹도록 설득을 계속했다.
결국 서울시와 코레일은 자신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수도권 통합 할인 시스템’ 도입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실행 첫 해에는 ‘광역좌석버스’가 빠져있었다.
서울시가 “광역버스는 고급 교통수단”이라며 끝까지 버텼기 때문이다.
김문수는 생각했다.
“광역 버스를 환승할인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미완의 성공일 뿐이다!”
서울 시장에 대한 지루한 설득이 또 이어졌다.
결국 1년 뒤인 2008년, 경기 광역버스에도 통합 요금제가 적용된다.
드디어 교통카드 한 장으로 서울시와 경기도의 모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구현된 것이다.
GTX의 비밀, ‘G’는 경기도였다
밤늦게 혼자 수원의 경기도지사 공관으로 복귀하던 김문수.
그의 눈에 사당역 정류장에서 겨울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수원시민들이 보였다.
다음날, 김문수는 서울시내 정거장에 경기도 직장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겠다고
서울시에 전달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행정구역이 달라 안된다는 답변이 왔다.
‘국민의 편리를 추구하는 일인데 행정구역이 문제가 되는구나...’
김문수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교통문제의 근본적 대안은 없을까?’
서울로의 출근길은 힘들다. 오죽했으면 ‘교통’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푸념이 넘쳐났다.
교통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구하던 김문수.
그 때 귀에 쏙 들어오는 제안이 있었다.
“기존 지하철보다 더 깊이 지하철로를 만들면 토지보상비가 들지 않고 노선을 직선으로 만들어 출근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 때부터 김문수는 GTX 건설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GTX는 Gyeonggi Train eXpress의 약자였다.
(지티엑스는 경기 트레인 익스프레스의 약자였다=> ai 성우 ?)
그런데 아무래도 G가 ‘경기’를 뜻하다 보니
중앙정부가 GTX 예산 지원에 선뜻 나서지 않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김문수는 아이디어를 내서 GTX의 G를 경기도가 아니라 GREAT의 G로 바꾼다.
그래도 GTX는 순조롭지 않았다.
국토부와 청와대를 설득하기 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민주당에서는 토목 삽질이라는 비난 공세가 이어졌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2024년 12월, GTX 운정~서울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김문수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출퇴근의 질’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국민의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야 말로 정치의 본령이다.”
닥터 헬기의 원조, 김문수
김문수는 소방분야에 진심인 도지사 였다.
그는 경기도에 소방서가 없는 시·군이 5곳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방서가 없는 모든 시·군에 소방서를 개청하라고 지시한다.
결국 김문수 도지사 취임 이후 1년 8개월 만에 모든 시·군에 소방서가 설치된다.
2025년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오징어게임>을 능가 하는 이 드라마는 아주대병원의 이국종 중증센터장을 모델로 했다.
‘우리나라에 누가 처음 닥터헬기를 도입했나?’라는 닥터헬기 논란은
이 드라마 때문에 시작되었다.
많은 언론에는 이재명이 2019년에 닥터헬기를 도입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이는 오보다.
그 보다 8년 전인 2010년 12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미 응급헬기를 도입했다.
2011년 4월에는 경기도와 아주대병원이 ‘중증외상환자 더 살리기’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당시 이국종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헬기만 있으면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으로 무려 15년을 허비했습니다. 그간 살리지 못한 생명이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경기도에 응급헬기가 갖춰져 반갑습니다.”
김문수 시절 도입된 응급헬기가 이재명 시절의 닥터헬기로 둔갑한 것은 ‘홍보’ 때문이다.
정치 홍보 없이,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다
김문수가 골프 못치고, 철봉만 하는 이유
김문수는 골프를 못 치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소위 ‘높은 자리’에 앉아 20년을 보냈지만 골프채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김문수가 골프를 못 치는 이유는 첫째, 돈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 시간이 없고. 셋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청렴영생 부패즉사’ 정신으로 무장하고 일체의 부정 비리와 담을 쌓고 살았던 20년 공직자 김문수.
그가 골프를 취미로 삼기엔 처음부터 무리가 많았다.
골프 대신 김문수는 철봉으로 건강을 챙긴다.
아침 시간, 동네 뒷동산에 올라가 6개씩 턱걸이를 한다.
철봉은 무료이고, 길어봐야 5분이면 끝난다. 하지만 운동효과는 좋다.
20대의 팔팔한 청춘도 3~4개 하기 힘든 턱걸이를 김문수는 하루에 6개씩 해낸다.
이런 근력과 정신력으로 김문수는 지난 세월동안 중심을 잃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반듯한 사람 김문수,
그는 오늘도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