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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순간들

김영삼김무성은 정치적아들이다

동진대성 2015. 11. 2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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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그의 족적과 남긴 것, 영욕의 세월을 돌아보려 한다.



‪#‎박정희와_독대‬
40대 기수론으로 김대중과 동승했던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점점 밀리던 와중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독대한다.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 김영삼에게 후계자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며, 이후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줄어들었던 점으로 보아, 모종의 이야기가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내 사견이지만 이때부터 김영삼은 여권의 세력, 경상도권의 지지 이런 것들을 정면에서 대결해서 민주적인 개혁을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스스로가 여권의 실세가 되어 위에서부터 개혁해 나가겠다는 구상을 가진 것이 아니냐,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김대중에게 이길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훗날 이 구상은 김종필, 노태우와 연합한 3당 합당으로 이어지며, 이것으로 인해 노무현과 결별하게 된다.



‪#‎3당합당과_민주개혁의_시작‬
노태우 정권 하에서 치뤄진 총선에서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해 버린다. 하지만, 총선이 끝나고 얼마 안가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는 국민 앞에 성명을 발표하고 3당 합당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대통령은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를 찍어줌으로서 여권에 힘을 실어 줬지만, 그것을 견제토록 국회에서 야권이 힘을 가지게끔 했던 국민들의 선택은 무용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나도 이 때의 시류를 똑똑히 기억하는데 대부분의 시민들이 분노했고, 정치가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첫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야권의 분열과 이합집산에 질려 버려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여당이 영구집권하는 게 낫다!'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다. 이 직전에는 6월 항쟁 등으로 시민들 스스로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는 자긍심이 높았지만 이 때부터 서서히 정치권, 특히 야권에 대한 불신과 조롱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분열'이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김일성_사망으로_인한_정상회담_무산_한총련과의_대립‬
김영삼이 취임하고 얼마 안가 김일성은 김영삼에게 정상 회담을 제안한다.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 했으며, 대한민국의 첫번째 문민정권이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북한과 정상회담 한다는 헤드라인이 매일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친히 김영삼과 정상회담 때 마실 와인을 골랐다고 전해지며, 김영삼 역시 정상회담 얼마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얼마 안남기고 갑자기 김일성이 사망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은 없던 일이 되 버린다. 그리고 남북 대립은 한층 심해졌으며 북쪽에선 고난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독한 기근으로 300만명이 굶어죽고, 국내에선 주사파와 한총련의 운동권 시위가 더욱 드세어진다. 운동권 시위는 급기야 연대항쟁을 불러왔으며 이 일로 연대는 쑥대밭이 되고 김영삼은 친히 연대에 나와 학생들이 시위에 동원한 쇠파이프, 죽창, 가스통, 화염병 들을 지목하며 좌경화 된 학생 운동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천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김영삼이 나서서 좌경 세력을 뿌리 뽑겠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연대에서 시위 말기에 한총련 지도부가 다수의 학생들을 속이고 자신들만 몰래 빠져 나간 것이 두고 두고 회자 되었기 때문이다.(마치 이승만의 서울 탈출 마냥) 이 일로 이후 한총련은 세력을 잃게 되었고 전대협을 거쳐 한총련까지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시위,데모크라시는 서민 중심, 농민 중심 운동으로 전개 되기 시작한다.



‪#‎총독부_건물의_폭파_금융실명제_하나회척결‬
당시 중앙청이라 불리던 건물이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이 건물을 일제의 잔재라 하여 없앨 것이냐, 아니면 문화적 가치, 역사적 가치를 생각해서 남길 것이냐를 두고 첨예한 사상논쟁이 이어진다. 철거를 반대하는 쪽은 비록 치욕의 역사라 하더라도 역사는 역사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철거를 해야 한다는 쪽은 김영삼 이하 민주지지파 쪽이었다. 일제 시대의 잔재는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문제는 이렇게 논쟁이 격화 되다 보니 서울시청, 서울역까지 철거 대상 범위에 들어 갔다. (모두 일제가 지어 놓은 건물)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까지 동원 된 토론과 논쟁이 격렬해진 끝에 김영삼은 서울시청과 서울역은 보존하고 중앙청만 철거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지시는 언제나 쾌속이었고 참모들과 거의 상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특유의 스타일로 밀어 붙인 것이 또 금융실명제다. 금융실명제는 사실 전두환 정권 초기부터 계속 필요성이 언급 되었던 것이지만 전두환, 노태우 둘다 시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하나회도 군부내에서 척결한다. 이것으로 박정희와 독대 때부터 생각했던 그의 미션은 대부분 클리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IMF로_천하의_역적이됨‬
IMF가 김영삼의 과냐 아니면 박정희 시대부터의 산물이냐 말이 많지만 나는 김영삼의 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앞서 얘기했던 그의 독단적이고 논의를 하지 않는 정치, 행정 스타일이 문제였다는 생각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뭘 어떻게 했던 현직 대통령은 상황 피해를 최소화 할 의무가 있는데 그의 개성 있는 결정 스타일 때문에 참모의 역할이 줄어들고 경제 환란을 제 때에 막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바톤은_김대중에게_그러나_앙숙으로‬
국민 모두가 들고 일어나서 김영삼을 마치 잡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이 비난하는 가운데(진짜 분위기가 험악했다) 김대중이 정권을 물려 받는다. 이후 김영삼의 친인척, 계열 인사들은 정계에 진출치 못하도록 김대중에게 철저하게 봉쇄 된다. 이것으로 인해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크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특히 김대중의 대북 정책, 그리고 정상회담 성사에 대해 크게 분노한다.(김일성이 죽지만 않았으면 자신의 업적으로 남을 일)훗날 북한의 핵실험 이후 이런 저런 의견 교환을 위해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대통령 4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 김영삼은 식사할 생각은 않고 상의 안쪽에서 주섬 주섬 준비해온 성명서를 펼치더니 "역사의 죄인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민 앞에 사죄하라!" 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고 한다.(진짜 뒤끝 오지다..-_-;;) 오히려 그 자리에서 전두환이 "여기까지와서 무슨 추태냐!"라고 소리 지를 정도였다고 하니 분위기를 짐작할만하다. 전두환은 사실 김대중에게 여러가지로 용서 받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랬을거라고 생각한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기술 않지만 원래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이려 했었다. 헌데 김대중은 정권을 잡자 그의 일부 영역을 복권/사면시켜주고 자신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할테니 화합으로 나가자고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 때 나도 상당히 놀랐다. 당연히 정치보복이 상당할 걸로 생각했는데)



‪#‎이후는_큰일이_없어‬
김대중 정권 이후 자신의 친인척/계열 인사들의 정계 진출이 철저히 봉쇄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 점점 잊혀지는 존재가 되었다. 가끔가다가 노망 난것 같은 소리를 한다고 신문에 나는 것 외에는 별일이 없었던 이런저런 정황을 볼 때 그의 말년은 꽤나 외로웠을거라 생각한다. 어찌 됐던 민주주의를 이 땅에 꽃피우고 싶던 열망이 있던 사람이었고, 김대중에게 이기고 그 행동을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서 결정했던 것이 '3당 합당'이다.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적자나 마찬가지였던 노무현에게 삿대질에 욕설까지 들었던 비운의 시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을 해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또한 민주주의의 중요성도 알고 그것을 더욱 가꾸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지만 대국적으로 국가 경영을 보는 눈은 부족했고, 도량이나 그릇 자체가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현재 그의 계열인 상도동계의 적자는 '김무성'이다.

‪#‎에필로그‬
김영삼 전대통령의 서거에 맞춰 그의 특집을 써보았습니다. 1979년부터 국내 정치 뉴스를 관심 있게 보았고, 6월항쟁, 연대항쟁 같은 큼직한 사건 때는 현장에 있기도 했고 여러 관련 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글은 다른 서적이나 자료를 인용하지 않았으며 김영삼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제가 가지고 있던 그에 관련 된 기억을 빠짐 없이 열거한 것임을 밝힙니다. 전대협 간부, 행정부 차관, 오마이뉴스의 기자, 한총련 핵심 간부 등에게 들었던 정보가 포함 되어 있으며, SNS의 특성 상 진위 여부를 따로 확인시켜 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저의 인생과 같은 시간을 향유한 사람에 대한 회고가 되겠습니다.
누구든 바라는 것이 있고, 대의가 있고 소의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지만 언젠가는 죽으며, 그 시간까지 무엇을 이루느냐 아니면 죄를 짓느냐 등등... 여러 군상이 있을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저의 20대를 함께 했던 역사의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대통령이 공과가 있고 장단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서로 치고박고 무디어지는 가운데 이 나라가 굴러가고, 점점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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